2025-10-17
예술가의 공간과 7억 벼락 부자
오늘은 래루와의 제주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날이다. 다른 날과 비슷하게 8시 쯤 일어나 나갈 채비를 했다. 돌아가는 날이니 캐리어도 쌌다. 비행기를 타기 전 래루가 가고 싶다던 카페외 공예품 편집샵을 들리기 위해 제주 시내로 향했다.
잠을 잤다간 장기가 없어져 있을 것만 같은 모텔을 3시간 대실해 캐리어를 던져두고 나왔다. 15분 정도 골목을 굽이굽이 걸어 가야 했다. 버스와 택시가 즐비한 대로변에서 마치 무신사에서 셀럽을 하고 있을 것만 같은 패션의 여자분을 봤다. 그 사람이 입은 옷을 보고 옆에서 걷고 있는 래루가 입은 옷을 봤다.
래루 저기 저 사람 보이지
응
너 가짜 광기 진짜 광기 비교하는 짤 알아?
응 본 적 있어 ㅎㅎ
저 사람이 가짜고 니가 진짜 같은 느낌이야
이런 얘기를 나누며 걸어가는데 묘하게 동선이 같은 느낌을 받았다. 래루가 아무래도 같은 목적지를 가는 사람인 것 같다고 했다. 그러다 거의 다 와서 그 분을 놓치게 되었다.
도착해 2층으로 올라가니 출입문을 보기만 해도 예술가의 공간 같은 편집샵이 있었다. 나무로 된 출입문을 밀어서 열었다. 마치 전시관처럼 꾸며 놓은 편집샵이었다.
나는 더운 날씨에 땀을 꽤나 흘리고 있었고, 안으로 들어가니 데스크에 있던 직원이 차를 드릴 테니 마시면서 관람하라고 했다. 우리는 누군가 손으로 열심히 빚은 것 같은 도자기 잔에 맑고 시원한 차를 담아 들고 구경을 했다. 거기에 정말 아까 길에서 본 무신사 셀럽도 있었다.
공예품마다 작은 글씨로 된 설명이 바닥에 붙어있었다. 이 가게 이름은 ‘오보에’인데, 가게 설명을 보면 ‘과거의 장면과 현대의 이야기를 연결하여 미래 지향적 빈티지를 지향’하는 공간이라고 한다. 뭐 이런 비슷한 뉘앙스의 설명들이 각각의 공예품에 써있었다. 사실 나는 시각 예술엔 그닥 조예가 깊지 않다. 안목이 갖는 것도 어느 정도 타고난 기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20대 초반 여러 전시를 보러 다녔지만 그다지 감흥을 느끼지 못해 나는 보는 작품에 대한 감은 없는 사람이라고 결론내렸다.
이런 나에 비해 래루는 마치 편집샵이 아니라 전시관에 온 것처럼, 상품을 들고 이리저리 보기도 하고 설명을 음미하며 천천히 그 공간을 누볐다. 그래서 나도 템포를 맞춰주기 위해 공예품 하나하나의 설명을 정독하며 돌아다녔다. 하지만 역시 뭐랄까, 딱히 감흥은 없었다.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가치와 지향을 담아냈다는 설명을 보며 그렇군~ 할 뿐이지 그게 도대체 이 상품 어디에 담긴 건지 알아채진 못했다. 그래서 이 공간이 마치 ‘통째로 뭐가 뭔지 잘 모르겠는 곳’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과 지향하는 가치를 녹여내기 위해 고민해 온 젊은 예술가들의 손때가 덕지덕지 남아있는 게 느껴져, 그 마음에 예의를 갖추기 위해 하나하나 다 감상을 했다. 그 중엔 이미 팔려 설명만 남고 물건은 없는 것도 있었다.
대부분의 공예품은 인위적이지 않은 것, 자연적인 모양새(재단한 듯 각지지 않은, 나무와 돌처럼 자연스러운 쉐입 혹은 재질)면서도 실용적인 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아무 용도도 없지만 공간을 장식하는 오브제(장식품)도 더러 있었다. 도자기에는 이런 설명이 있었다. ‘완벽을 추구하지 않는다. 만들다가 아름답다고 느끼면 작업을 멈춘다. 투박하고 마감이 안 된 것처럼 보여도 아름답다면 거기서 그만둔다.’ 기술가가 아닌 예술가 다운 생각이었다. 이 공간에는 이런 식의 가치지향적 물건이 많았다. 상품과 작품의 경계를 찾으려는 노력이 느껴졌다. 몇 장 사진을 찍어서 이런 곳에 왔다고 B에게 보내줘야지 하는 생각이 들어 휴대폰을 꺼냈다. B에게 먼저 카톡이 와있었다.
롱아 올때 붕어빵사와
제주부어빵
오후 12:54
나오늘 꿈꿨는데 은행이율이막 올라가지고 내 통장에 7억 넘게 있었다 살도 빠져있고ㅋㅋㅋㅋ 그래서 우리 집 사자고막 그런얘기햇어
오후 12:55
이걸 보는 순간… 되게 무게 잡는 영화에서 상업 코미디 영화로 내 몸이 튕겨져 나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좀 더 비유해보자면, 조직폭력배 패싸움 중에 갑자기 옆 건물에 트로트가 나와서 몰입이 깨지고 상황이 다 정리되버린 그런 시트콤의 한 장면 마냥 나는 예술을 음미하는 사람들 한 가운데에서(진짜 위치도 가운데 쯤이었다) 카톡이 와있는 화면을 켜놓고 덩그러니 서 있었다. 그 상황이 너무 웃겼다. 7억 벼락 부자가 된 꿈을 꿔서 들뜬 B가 귀여웠다. 그 카톡을 래루에게도 보여줬더니 래루도 웃었다. 역시 래루는 나랑 통하는 게 있다.
그리고 한참 동안 은행 이율이 올라 7억을 벌었다는 문구가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어쩜 꿈도 저렇게 현실적으로 꿨을까. 생각할수록 이 공간과 더 이질감이 들어 더 웃겼다. 래루는 그 공간을 마음에 들어했고, 나갈 때쯤 가죽 공예품 하나를 집어들어 계산했다. 직원은 래루의 옷을 보고 마치 고수를 알아본 것처럼 묻지도 않았는데 이거는 제가 만들었어요, 저희는 주기적으로 전시도 열어요, 저는 이 안 쪽에서 작품을 제작해요 하며 미주알 고주알 얘기를 했다. 무신사 출신 옷을 입은 나는 둘이 더 얘기하라고 세 발 떨어져 다시 아까의 7억을 생각했다. B에게서 이런 모습을 느낄 때가 좋다. 추상적인 생각을 하다보면 몸이 붕 떠오르는 기분이다. 그럴 때 B(현실붙박이)와 함께 있으면 B가 나를 땅으로 끌어내려 준다. 날아가지 말라고. 그래서 B와 있으면 지상에 발을 붙이고 생명력있게 살아간다. 살아있는 기분이다. 영원이 없고, 끝이 있고, 살아있는 순간에 충실해진다. 내가 웃었더니 B가 왜 웃냐며 꿈이라고 슬퍼했다.
돌아가는 길에 래루랑 또 7억 벼락 부자 얘길 했다. 래루가 계속 웃었다. 다른 얘기 하다가도 자꾸 떠오른다며 몇 번을 갑자기 웃었다. 내가 왜 B를 좋아하는지 알겠다며 같이 있지 않은데 내적으로 친해진 기분이 든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 행선지인 카페로 향했다. 초콜릿과 청귤 요거트를 산 곳인데, 아무래도 청귤 요거트를 사러 B와 제주도를 갈 때 또 방문할 것 같다.